
한 외국신학교의 교수가 한국 유학생에게 ‘통성기도’ 시범(?)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만큼 통성기도는 한국교회에서 행해지는 독특한 기도방식이다.
통성기도의 유래는 한국교회 초기 부흥 운동으로 알려져있다. (특히 고 길선주 목사님과 함께)
“통성기도는 비록 소리의 바벨탑을 쌓는 측면이 있지만, 단체로 죄를 고백하고 마음속에 숨겨진 것들을 끄집어 낼 수 있는 방법으로 효과적이다. 본성적으로 자부심이 강하고 과묵한 사람들이라 이런 식이 아니고는 자기 속에 숨은 비밀을 털어 내놓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도움을 받을 곳이 없는 어려운 현실이었기에 이들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 앞에 체면불구하고 자신의 몸을 내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평가하든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나라 잃은 백성들의 절망과 좌절을 깨뜨리시고 그 무엇으로도 흔들 수 없는 영원한 안식으로 이들을 이끄셨다는 점이다.”(캐나다 선교사 James Scarth Gale)
통성기도는 기독교를 전한 외국 선교사분들에게도 낯선 경험이었다.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지금의 통성기도와 달리 초점이 ‘죄의 고백과 회개’에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일반적인 모습인 ‘욕망의 확성기’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부르짖는’ 기도, ‘끈질긴’ 기도. ‘돌파하는’ 기도.
기도 앞에는 유달리 수식어구가 많다.
그만큼 기도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을 방증한다.
하지만 기도의 내용이 ‘성공, 명예, 부’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러한 관심은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지 않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믿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하는지 모른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자신이 기도하는 목적이 손에 쥐어지지 않는 한, 그 불안과 염려를 놓지 못한다. 그 사람은 ‘기도 대장’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알고 보면 ‘염려 대장’이다. 포사이스가 말한 것처럼, 그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믿는’ 사람이다.”(김영봉, 사귐의 기도, p.52.)
기도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교제의 수단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여전히 은혜의 방편으로 적극적으로 권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믿음의 부재에 기인해서 기도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
기도의 사람들로 알려진 사람들이 생각보다 여기에 많이 속해있지 않을까.
기억하자. 종종 ‘믿음’이 없을 때 기도(하는 행위)를 믿게 된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염려를 먼저 맡기고.
믿음으로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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